"조남기, 중국군 최고위직…항일 독립운동가 후손"

소정현 / 기사승인 : 2013-08-28 14: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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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中國을 빛낸 별 조선족’(2) 조남기(上)
[일요주간=소정현 기자] 중국 인민해방군 최고위 계급의 하나인 첫 상장(上?)에 올랐던 조선족 출신의 조남기(趙南起)는 조선족뿐 아니라 소수민족을 통틀어 중국 정계에서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조남기는 두 번이나 1987년 인민해방군 후방근무사령부(후근부) 사령관과 1988년 중국 인민군에서 17명밖에 없는 최고 계급인 '상장'의 자리에 오른다.
조남기는 예편후 1998년 3월 국가원로 예우직인 ‘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제9기 전국위원회에서 군부 대표로 부주석(부총리급)에 선출되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제1서기, 조선족으로서는 처음으로 길림성 1인자인 당위원회 서기를 지낸바 있는 일선 행정기관과 '공산당-군'의 책임자 자리를 두루 거쳤다.
조선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 묵묵히 수행해온 조남기장군의 이런 혁혁한 공로는 2004년 7월 중국 인민출판사에서 ‘조남기전(傳)’으로 출간되었다.

인민해방군 최고위 계급의 하나인 상장(上?)에 올라
통역장교로 6.25 참전하여 모택동 장남과 깊은 우애

문화혁명 당시 조선족 영웅 주덕해를 보호하다 곤욕
1976년 10월에 4인방 몰락 '새로운 세상' 활짝 맞아


● '조부는 독립운동가' 충북 청원군 출생

조남기는 1927년 4월 20일 충청북도 청원군 강내면에서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남기란 이름은 조선의 저명한 학자이며 애국지사인 조부 조동식(趙東植)이 지어줬다. 조용구(趙龍九)는 조남기의 부친이며,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후 문화 계몽운동 선봉이었던 조부 조동식은 1919년 3ㆍ1운동 당시 대봉화 횃불시위를 주동하여 공주 감옥에 3년간 투옥됐다 풀려난 항일 투사였다.
조남기가 12살 때, 일제 탄압이 심해지고 고향살림이 어려워지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온 가족은 1938년 중국 길림성(吉林省) '영길현(永吉縣) 차로하진'에 이주한다. 조남기는 그곳에서 소학교 공부를 마쳤다. 중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가정형편에 꿈을 접고 '차로하진 상업련합사'에 들어가 점원 생활을 하였다.
1942년 7월 조남기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이어 1944년 조남기는 중국에서 항일(抗日)전쟁이 끝난 후 중국 재건을 둘러싸고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벌어진 국공내전((國共內戰)에 참전하여 1937∼1945년에 일본군과 싸운 중국 공산당의 주력부대 가운데 하나인 팔로군(八路軍)에 입대한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일제가 물러난 만주지방은 힘의 공백 상태였다. 조남기가 살던 차로하진도 늘 토비와 강도들이 나타나서 동네 주민들은 불안에 떨었다. 조남기는 불과 18세에 마을 청년 100여 명을 모아 차로하 자위대를 만들어 대장을 맡았다.
조남기는 1945년 12월 인민군과 인연을 맺으면서 中공산당이 동북지방에 파견한 '동북민주연군'(東北民主聯軍)에 가담한다. 앞서 그해 10월, 중국 공산당이 동북지방 장악을 위해 보낸 군대인 동북민주연군이 차로하에 진입했다.
당시 조남기는 차로하진 8개촌의 조선족으로부터 가가호호 쌀을 거둬 민주련군을 지원했는데 석 달도 안 돼 10만㎏이나 되는 입쌀을 보탰다. 이 일은 길림지구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조남기는 각급 조직에서 주목하는 청년이 되었다.
조남기는 동북민주연군의 부사령관인 저우바오중(周保中)을 만난 자리에서 "자위대 대원 83명을 데리고 공산당의 군인으로 일하겠다."고 밝혔고 저우바오중 장군의 배려 하에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에서 장교로 공부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조남기는 군정대학 조선족반을 떠나 한족반에서 공부하겠다고 자원하여 중국어 실력을 엄청나게 쌓았다. 조남기는 훗날 이렇게 술회한다. "소수민족으로 중국에서 입지를 굳히려면 중국어를 잘해야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46년 말, 중국 길림성위에서는 동북군정대학 길림분교의 민중운동 공작대원을 선발한다. 조남기는 1천여 명의 학생들 중에서 최종 선발된 5명중의 한사람으로 뽑혔다.
조남기는 1946년 12월, 군정대학을 수료하고 토지개혁사업단에 투신하여 연변 일대 토지개혁을 위해 종횡무진 현장을 누볐다. 1948년 초까지 연길-훈춘-화룡-돈화-왕청 등 5개현의 9만4천여 가구의 농민들에게 지주에게 빼앗은 3억8천만 평에 이르는 논밭을 분배하는 일을 무난하게 수행했다.


● 6.25 전쟁 '군수와 통역장교'로 복무

6.25 한국전쟁이 고조되던 1950년 8월 중순, 북한은 중국 공산당에 동북지방의 조선족 간부들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조남기도 당시 북한 파견 간부로 선발됐으나 한국전쟁의 전세가 악화되자 곧바로 북한에 가지 못했다.
6.25가 촉발되자 중국은 만일에 사태에 대비하여 해방군 소속 '동북변방군'을 북한 국경지대에 집중 배치했다. 조남기는 7월 13일 동북변방군에 편입되어 연락원을 맡았다.
1950년 10월 23일, 새벽 조남기는 펑더화이(彭德懷) 총사령관, 훙쉐즈(洪學智) 총후근부장(군수사령관)을 수행하여 23세의 중국 청년장교 신분으로 참전한다. 인민지원군 후방근무사령관 훙쉐즈는 조남기를 사령부 작전처 장교로 배속시킨다.
조남기가 평안북도 삭주군 대유동에 자리 잡은 인민지원군사령부(중국이 한국전쟁에 투입한 해방군 병력의 통괄 지휘기구)에서 맡은 일은 북한과 중국 고위 관계자간 회담할 때 통역 업무와 사령부의 작전명령을 일선부대에 직접 하달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업무 탓인지 펑더화이(彭德懷) 지원군사령관의 바로 옆에 숙소를 배정받았다.
조남기는 모택동의 장남인 마오안잉(毛岸英)과 한 방을 쓰면서 전우로서의 깊은 우의를 다진다. 당시 마오안잉은 러시아어 통역을 맡았다.
마오안잉은 자신이 모택동 주석의 아들인 체를 하지 않았고, 사령부의 지휘관 일부를 제외하고 마오안잉이 모택동 주석의 아들이라는 것은 일체 비밀에 부쳤다.
1950년 11월 25일은 조남기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오전 10시 남짓, 공습경보가 울렸다. 미군 전투기 4대가 구름을 뚫고 대유동 상공을 날아왔다. 전투기가 지나간 뒤 불과 몇 분이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산기슭 목표물에 네이팜탄을 퍼부었다. 석양이 질 무렵 참모진들은 펑더화이 사령관을 따라 시신을 대유동 산기슭에 안장했다. 당시 마오안잉의 나이 28세였다.
조남기는 펑더화이 사령관의 통역업무는 물론 물자조달운송을 담당하면서 밤낮 가리지 않고 전선과 후방을 왕래하면서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다. 1951년 6월 훙쉐즈장군의 명령에 따라 작전처에서 후방근무사령부(후근부)로 전보 발령을 받아 한국전이 종식될 때까지 군수품 수송의 실무책임을 맡았다.
조남기는 박헌영(朴憲永) 당시 북한 부수상 겸 외상이 펑더화이 지원군 사령관과 면담할 때 한국어 통역을 맡았는데, 박 부수상으로부터 "조국에 와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완곡하게 거절했다.
조남기는 1954년 봄에 지원군 후근부 직할의원 간호사이던 임춘숙과 결혼한다. 1955년에는 한국전에 참전한 공로를 인정받아 상장(上?)에 임명됐다. 1957년에는 군수부문 총책임자인 인민해방군 총후근부장에 올랐으나 1959년, 6.25전쟁에 참전한 펑더화이(당시 부총리 겸 국방부장)가 모택동 주석의 대약진 운동을 비난한 '뤼산(慮山) 회의'에서 실각하면서 인생에 가장 큰 위기를 맞았다.

● '조남기 운명' 칼날 끝에 선 문화혁명

조남기는 1960년대 문화혁명 때, 길림성 연변군구 정치위원을 지낼 때 조선족의 대부였던 주덕해(周德海) 당시 연변 조선족자치주 당서기를 옹호하다 6년 동안 사실상 연금생활을 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모택동 주석이 주도했다고 해서 처음에는 문화혁명에 대해 호감을 가졌던 조남기는 이내 지나친 무질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문혁파와 대립각을 세운다. 1966년 8월,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연변에도 불똥이 세게 튀었다. 그해 12월 일부 중국 대학생들이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가 북한 땅에다 '국제 홍위병을 만들자'는 구호를 붙이는 일까지 생겨났다.
문혁의 소용돌이에서 연변에서 최우선 현안은 조선족의 거목인 주덕해(朱德海)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 주덕해는 길림성 부성장과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당서기 겸 주장, 연변군구 제1정치위원을 지낸 조선족 출신의 대표적 '당-정-군' 지도자였다.
조남기는 조선족들이 받을 마음의 깊은 상처를 우려해 주덕해를 보호하려 했다. 주은래 총리의 지시에 따라 주덕해를 북경으로 보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사람들이 시류를 따르라고 권고할 때도 조남기는 주덕해 타도에 동참을 거절했다.
길림성 연변에서 문혁 활동의 본산은 모택동의 친손자인 당시 27세의 마오위안신(毛遠新)이었다. 마오위안신은 그에 대하여 깊은 원한을 가졌다. 주덕해를 보호하던 조남기에게 칼끝을 들이댔다. 1967년 11월, 조남기는 격리심사를 당하고 그의 가족 역시 온갖 박해를 당했다.
1967년 8월부터 1968년 3월까지, 조남기는 집안을 압수수색당한 것이 60여회였고, 그의 딸은 하마터면 죽을 수도 있었다. 매번 권총을 조남기의 가족들에게 들이대고, 조남기의 처는 거의 정신착란을 일으킬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조남기는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난다.
조남기는 재교육을 위한 정치 학습반에서 자기반성을 철저히 해야 했다. 아내는 노동 개조를 위해 농촌에 내려가야 했고, 조남기는 4명의 자녀를 다 챙겨야 하는 어려움이 계속됐다. 심지어는 네이멍구(內蒙古) 농장으로 쫓겨 농사일을 하기도 했다.
1969년 하반기에 조남기는 매년 적자인 장춘의 발전설비창으로 내려보내진다. 조남기는 자포자기 하지 않는다. 생산과 관리상황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시스템적으로 분석한 후 공장의 낙후한 면모를 일신하여 상부의 주목을 받는다.
1972년 주은래총리가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북지방에 들려 '조선족 간부들을 외국 간첩으로 몰아세우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단언하면서 조남기의 정치적 생명도 부활을 맞았다.
당시 삼양군구 정치위원이며 요녕성(遼寧省) 혁명위원회 부주임으로 기세등등하던 마오위안신도 저우언라이 총리의 결정에는 어쩌지 못했다.
조남기가 진정한 해방을 맛본 것은 1976년 10월 4인방이 몰락하고 마오위안신이 구속되면서부터였다. 이제 조남기는 새로운 세상을 활짝 맞았다.
조남기는 문화혁명의 시련에 대해 좋은 인생 공부였다고 회고했다. "1945년 혁명에 참가한 이후 나의 인생은 순풍이었다. 25세에 연대장급 간부, 40세가 못돼 사단장급 간부로 국경 일대 군구를 책임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보면 문혁기간 4년여 동안의 시련은 돈 주고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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